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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를 너무 앞선 탓에 접어야 했던 포도 농사를 나이 쉰에 다시 시작한 홍병식씨는 현재 친환경으로 머루포도를 재배, 바우농원 홈페이지를 통해 전자상거래로 판매하고 있다. 홍씨가 아내 정순영씨와 함께 포도 과수원에 나란히 섰다. |
| 홍병식(63·충남 아산시 배방읍 회룡리)1972년에 군복무를 마치고 달리 기술이 없던 나는 부모님을 따라 농사를 짓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농사도 무조건 많이 생산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정말 안 해본 농사가 없을 정도다.
몇해를 헤매다가 한가지에 매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포도 농사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품종을 잘 선택해야 했는데, 당시 시중에 나오는 포도는 〈캠벨얼리〉뿐이었다. 어렵사리 농촌진흥청 원예시험장 담당자와 연결돼 유망 포도품종 몇가지를 추천받을 수 있었다. 그때 분양받은 것이 지금 재배중인 〈스튜벤〉과 〈세네카〉(청포도)다.
첫해에는 지주목을 살 돈이 없어 직접 콘크리트 지주를 만들어서 3,300㎡(약 1,000평)에 두품종을 심고 가꿨다. 드디어 첫 수확을 했는데 포도 맛이 기가 막혔다. ‘이 정도면 최고 대접을 받겠지’ 하는 기대를 안고 출하를 했다.
그런데 경매에 붙이니 상인들이 “포도가 덜 익고 볼품없다”면서 모두 피하는 게 아닌가. 맥이 탁 풀렸다. 상인들이 알아줘야 소비자들한테도 인정받을 수 있는데 거들떠보지도 않다니…. 포도 한상자를 풀어 상인들에게 맛볼 것을 권했다. 그제야 맛은 좋다면서 소량이나마 구매를 해 갔다. 그해 재배한 포도는 그럭저럭 팔았지만 좋은 값을 받을 수는 없었다.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던 것이다.
1980년대 초 식량 자급이 이뤄지자 농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주곡 농사에서 경제작물로 전환하며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보니 생산이 과잉돼 생산비도 못 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도 과수는 다른 작물로 전환하기가 어려워 정부에서 폐원보상비까지 주면서 농사를 접게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 무렵 온양에 사는 친구로부터 양계가 수익이 짭짤하니 한번 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1983년 비닐하우스를 계사로 개조해 산란계 1,500마리로 양계를 시작했다. 해보니 재미가 있었다. 그때부터 헐값에 내다 팔아야 하는 포도 농사를 접고 포도밭에 계사를 지어 1만마리 규모의 산란계 사업을 벌이게 됐다.
내 삶에는 농사 말고도 곡절이 많았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못 배운 것이 한이 돼 기회가 된다면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책 살 돈이 넉넉하지 않아 모처럼 천안 시내에 나가면 겨우 영농서적 한권을 사들고 버스비가 없어서 30리 길을 걸어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절망 속에서도 간절히 염원하면 기회는 오게 마련인 법. 1975년에 방송통신고등학교란 제도가 생겼다.
나는 대전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라디오를 통해 강의를 들었으며, 매주 일요일에는 대전고에 가서 선생님들로부터 수업을 들었다. 지금도 나는 어디를 가든 학력을 말하라면 당당하게 이 졸업장을 제시한다. 바쁜 농사일 와중에 피나는 노력으로 얻은 졸업장이기에 조금도 부끄럽지가 않은 것이다.
농사에 열심히 매달린 만큼이나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동네 이장도 지내고 농협 대의원으로도 활동했다. 1993년에는 농협 조합장에 도전해 주변의 많은 분들 도움으로 당선돼 무난히 임기를 마치기도 했다. 그리고 나이 쉰에 다시 농업에 복귀하게 된 것이다.
다시 농사를 시작하며 맹세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작목을 열심히 하자는 것이었다. 역시 답은 포도였다. 맛이 좋은 〈스튜벤〉을 10그루 정도 남겨 뒀기에 그것을 증식해 지금의 6,600㎡(약 2,000평) 포도밭을 만들 수 있었다.
새로 하는 포도 농사인 만큼 각오도 남달랐다. 예전에 깨달은 바가 있어 나무의 생리를 돕고 햇볕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도록 포도나무를 지탱해 주는 덕 시설부터 개량했다. 때마침 2000년 겨울 이 지방에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들이 많이 무너지는 바람에 헌 파이프를 헐값에 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농사지으면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 농약을 치는 일이었다. 물론 농약을 쳐도 안전규정을 잘 지키면 해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농민 입장에서는 문제가 심각하다. 농약을 칠 때 원액이나 수화제를 직접 다뤄야 하고 작물에 뿌릴 때 조금이나마 흡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묘목을 심고 1~2년은 그런대로 농약을 치지 않고 잘 넘겼다. 그러나 과실이 열리는 첫해에 봉지도 싸기 전에 새눈무늬병에 걸려 거의 수확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아 애초 마음먹었던 비가림 시설을 하기로 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포도순과 열매까지 병반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나무가 자라는 데 필요한 환경 조건만 맞춰 주면 농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자신감을 갖고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천안출장소에 찾아가 친환경인증 신청을 하고 본격적으로 친환경재배에 들어갔다. 처음 저농약에서 시작해 무농약과 전환기 과정을 거쳐 이제는 명실공히 자타가 인정하는 유기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다시 포도를 수확한 첫해, 다른 농가들과 함께 농협을 통해 출하를 했다. 〈비양산 머루포도〉라는 이름을 달고 4㎏씩 포장해 예산원예농협 공판장으로 싣고 갔다. ‘맛이 남다른 만큼 이제는 인정해 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경매사에게 포도에 대한 설명을 했다. 한데 중매인들은 가끔 와서 둘러보고는 별 반응이 없었다. 맛은 인정했으나 경락값은 〈캠벨얼리〉의 절반 수준이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렇게까지 후려치지는 않았는데…. 물건을 그대로 내려놓고 오기에는 너무 억울해 유찰을 시키고선 도로 싣고 돌아왔다.
그동안 함께 고생한 아내(정순영·62)를 볼 면목이 없었다. 평소같으면 푸념을 늘어놨을 아내조차 맥이 풀린 나를 보고선 말을 잃었다. 오랜 침묵 끝에 아내가 국도변에 천막을 치고 직접 팔아 보자고 했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 나로서는 아내의 말이 고마울 뿐이었다. 다음날 국도변 휴게소 근처에 자리를 마련하고 판매에 들어갔다. 나들이객들은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맛을 보고선 “이렇게 맛있는 포도는 처음 본다”며 다들 한두상자씩 사갔다. 역시 소비자는 달랐다. 옛날같으면 보기 좋은 것을 골랐을 텐데 이제는 맛과 품질을 알아주는 것이다.
그렇게 첫해 수확한 포도는 무난히 팔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는 수확량이 늘어 직판으로 팔기는 버거웠다. ‘우리 포도는 소비자와 직접 만나야 인정받을 수 있는데….’ 묘책을 찾던 중 문득 홈페이지를 통한 인터넷 판매가 떠올랐다. 하지만 여기저기 홈페이지 제작을 의뢰해 보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이 길이 아니고서는 달리 포도를 판매할 방법이 없었다. ‘내가 직접 배워 보자’고 마음먹고 무료 홈페이지 교육 프로그램을 찾아 신청을 했다. 컴퓨터 기초부터 시작해 프로그램을 이용한 홈페이지 만들기까지 4주간의 교육을 받고 어설프게나마 내 손으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홈페이지만 만들었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네티즌들이 보고 찾아올 수 있도록 여러 포털사이트에 등록을 해야 했던 것이다. 방법을 찾던 중 포털사이트에서 내주는 무료 공간에 2차 도메인을 만들어 등록하고, 야후·다음·네이버 등 여러 사이트에 홈페이지 주소를 올렸다. 그러고 나니 방문객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주문자도 생기기 시작했다. 2003년부터는 고유 도메인을 만들어 농림수산정보센터에 등록, 제대로 된 쇼핑몰을 사용하니 성과도 좋고 매출도 쑥쑥 올라갔다. 돌이켜 보면 감회가 깊다.
이제는 인터넷에서 ‘머루포도’를 입력하면 가장 먼저 검색되고 판매량도 꽤 늘어나서 포도 수확철에는 택배 포장하기에 바쁘다. 이나마 하게 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컴맹이 단지 의욕 하나로 전자상거래에 관한 교육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아다니며 배운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것은 낯모르는 사이버 공간이지만 신뢰를 보내 주는 네티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자상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신뢰를 쌓는 일이다. 우리는 물건을 배송한 다음날 저녁 잘 도착했는지 반드시 확인 전화를 한다. 또한 게시판에 글이 올라오면 곧바로 성의 있게 답을 한다. 간혹 언짢은 글이 올라와도 절대로 삭제하지 않고 더 자세하게 답을 한다.
오늘의 농촌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길을 찾으면 어딘가에는 희망의 새 길이 있게 마련이다. 가난한 농사꾼으로 살면서 그때그때 환경에 적응하며 카멜레온처럼 살아온 것 같다. 이 나이에 전자상거래까지 하는 게 괜한 고생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농업도 시대에 맞게 변화하고 적응하면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이는 젊은 세대와 소통하며 외롭지 않게 후반기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O041-548-0574. |